2007. 12. 16. 17:54

피아니스트 백건우님 인터뷰

초겨울비가 설설 뿌리는 밤 11시, 백건우 부부는 식전(食前)이었다. 예술의전당 건너편 한 냉면집에서, 그는 물냉면과 갈비탕을 동시에 해치웠다. “정말 중노동입니다. 무거운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종일 두드렸으니”라면서. 손목에는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


그는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全曲) 32곡을 일주일 동안 연주하는 중이었다. 그는 오전 9시 반부터 나와 텅 빈 홀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 이날 밤 8시에 시작된 공연은 10시에 끝났다. 무대 조명 아래 연미복을 입은 그는 간데없고, 물 날린 검은 남방셔츠를 입은 배가 불룩 나온 ‘곰 같은 아저씨’가 내 앞에 앉아있었다. 온몸이 허기와 피로에 절어 있었다.


“육체적으로만 힘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늘 긴장하고 집중해야 하지요. 연주(演奏)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창작’을 하는 것이니까요.”


연주회에서 나는 그의 음악을 듣기보다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는 뚜벅뚜벅 무대로 걸어 들어왔다. 객석을 향해 인사한 뒤,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쳤다. 그 과정은 짧았고 한마디 말도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팬들에게 흰색과 검은색 펜으로 사인을 해줄 때도 말 한마디 없었다.

인터뷰에 응하는 그의 말도 서툴고, 잘 들리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면 말이 필요 없어 좋겠군요”라고 농을 하니, 그는 “정말 그렇다”고 동의했다. 나중에 노래 실력을 물었을 때도, 이 정상급 피아니스트는 “사실 음치예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피아니스트이면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별로 못 본 것 같아”라고 했다.

―다른 작품도 많은데 베토벤의 소나타만 전곡을 모두 연주하는 걸 보니,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그런 성격인가요?

“좀 그런 스타일이에요. 어느 주제를 갖고 끝까지 가야지, 이거 찔끔 저거 찔끔하는 것은 만족 못 해요. 이번 연주도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초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베토벤 세계를 한눈에 한몸에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요. 보기에는 제가 이래 생겨도 강한 성격이에요. 원하는 어떤 목표가 있으면 그것을 달성하는 쪽이에요. 이 때문에 연주 하나하나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경쟁에서 몇십 년을 혼자서 버텨온 셈이죠.”


―독일 본(Bonn)에 있는 베토벤 생가에서 건반이 움푹 팬 피아노를 봤지요. 선생의 피아노는 무사합니까?

“베토벤은 200년 전이니까, 많이 쳐 닳아서 그럴 수 있고, 세월의 흐름으로 상아(건반 재료)가 삭아서 그럴 수도 있고. 제 것은 좋은 피아노라서(웃음). 파리의 아파트에서도 늘 밤 10시까지 쳐요. 아무리 쳐도 내 연주에 만족을 못 해요.”

―피아노를 친 지 50년이 됐는데, 이제 눈 감고도 치는 경지가 아닌가요.

“악보 한 페이지를 놓고 수천 번을 읽어요. 몇십 년을 그것을 읽어봐도 또 거기 다른 것이 있고, 또 다른 것이 숨어있고, 제 연주에 만족을 못 하니까, 또 하고 하는 거겠죠. 항상 뭐가 더 필요한 것 같고. 만족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니 계속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종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은 정말 단조로운 행위이겠군요.

“같은 건반으로 같은 곡을 쳐도 다 다르지요. 제가 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음악을 알면 알수록, 제가 그 음악에 못 쫓아가고 있는 걸 깨닫지요. 죽을 때까지 내 음악은 미완(未完)으로 끝나겠지요. 이런 생각 하면 슬프지요. 하지만 제 삶이 여전히 음악 속에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연주에 대해 강요를 많이 받았고, 그런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살겠다는 욕망만으로 열다섯 살부터 뉴욕에 혼자 남았다는데, 지금은 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떤가요?

“자식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은 부모들은 다 마찬가지겠죠. 제가 이해를 못 했을 수도 있겠지요. 제 수준 이상의 것을 요구하니까. 훈계하는 데는 과정을 밟아야 하고, 다 때에 맞는 것이 있지요. 그래서 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예술성이 뛰어나신 분이었으니, 제가 물려받은 것은 너무 많죠.”

―남들처럼 성장을 제대로 못했다는 아픔이 남아있군요?

“9살 때부터 독주회를 한 뒤로 죽도록 피아노만 쳤고, 그 나이에 하루 5~6시간씩 연습하라고 했으니까요. 사실 그건 무리죠. 어린아이가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거죠. 그 나이 때는 친구들이랑 나가서 놀아야지요. 이런 성장 과정 때문에 제가 좀 내성적이 됐는지 모르죠.

그 뒤 뉴욕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뛰어들었지요. 언어도 안 통하고 제가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단지 나의 무기라는 것은 피아노 하나밖에 없었지요. 숱한 방황과 좌절을 겪었지요.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극복되고 나니 그런 어려움이 도움이 됐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왜 피아노로 다시 돌아왔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살고 가는데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많이 생각했어요. 그래도 음악이고 그래도 피아노더라고요.”

―그때 자신의 앞으로 삶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나요?

“물론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그런 것은 다 있겠죠. 그런데 제 생각이 소극적일지는 모르나, 그보다는 음악을 얼마나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게 더 급한 큰 숙제였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일상은 피아노를 치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해요. 굉장히 단순해요. 음악을 한다는 것이 제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해요.”

―이제 젊은 날의 꿈이 거의 이루어진 셈입니까?

“그렇게 볼 수 있죠. 제가 다른 것 안 하고 음악만 하면서 살아올 수 있게 됐으니. 그것만 해도 고맙지요.”

―50년간 그렇게 음악만 해올 수 있었던, 그 힘은 뭘까요?

“작곡가로 태어난 사람은 작곡을 해야 하고, 작가로 태어난 사람은 글을 써야 돼요. 마찬가지로 저는 연주자로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그 악기(피아노)를 가지고 그것을 통해서만 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피아니스트는 타고나는 겁니까, 만들어지는 겁니까?

“첫째로는 타고나는 것이 중요하죠. 그렇게 타고나지 않았으면 90% 노력을 해도 안 되니까. 또 타고났다고 게을리하는 사람도 성공을 못 해요. 저보다도 더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많죠. 하지만 게을리할 때는 음악의 속이 비더라고요.”

―세상 사람들의 사는 방식에서 어떤 점이 가장 서툰가요?

“남들과의 관계죠. 혼자서 피아노 앞에만 있으니까 그 관계를 쉽게 이루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내성적이 됐고.”


―그런데 내성적인 분이 어떻게 영화배우와 연애를 했습니까?

“그때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서 조금 지난 후였죠. 어쨌든 처음 보는 순간 황홀했죠.”

1972년 그는 뮌헨올림픽의 문화축전에 초대된 윤이상(尹伊桑)의 오페라 ‘심청’을 보기 위해 날아갔다. 거기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심청’으로 참가한 여배우 윤정희를 만났다.

이 대목은 윤정희씨가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순수한 꿈과 환상이 많았어요. 이이를 처음 만났을 때, 참 순수한 매력을 느꼈어요. 내가 꿈꿨던 사람이구나. 뮌헨에서 유학생들과 어울려 맥줏집에 갔어요. 저만 여자고 모두 남학생들이었어요. 그런데 이이는 굉장히 부끄러워했어요. 말도 없었고. 그때 장미꽃을 파는 사람이 왔는데, 제일 말 없는 사람이 제게 선뜻 장미꽃을 사주더라고요. 속으로는 정말 좋았죠. 이 수줍고 순수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이런 용기가 있구나 라고.”

―부인이 어떤 점이 가장 매력적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굉장히 솔직해요. 꾸밈새 없고, 생활에 대한 관심이나 철학도 너무 닮았어요. ”

―곁에 윤정희씨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30년을 어깨 비비며 함께 살았으니까. 제 음악 세계를 정말 이만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처럼 섬세하게 들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부부간에 다투지는 않습니까?

“다투지 않으면 재미없죠. 의견 충돌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저는 굉장히 느리고, 이쪽은 굉장히 빠르니까 조금 답답해하겠죠.” 윤정희씨가 “내가 빨라도, 항상 지나고 나면 내 판단이 늘 옳았죠?”라고 하니, 그는 잠자코 있었다.

―결혼식(1976년)을 재불 화가 고암 이응노(李應魯) 화백의 집에서 했지요.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까?

“저희들은 둘 다 유명인이지만 화려한 결혼식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냥 마음에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 같은 분들만 모여 하는 것을 원했어요. 이응노 선생님을 부모같이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존경했어요. 하지만 뒷날 그 사건으로 너무나도 인간에 대해서 많이 실망을 하게 됐지요.”

1977년 8월 1일 윤정희-백건우 부부는 당시 공산국가였던 유고의 수도 자그레브로 유인됐다가 북측에 납치될 뻔했다. 당시 이들 부부와 동행했던 이는 이응노 화백의 부인 박인경씨였다. 박씨는 우리 정부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된 인물이다. 사건 직후 그녀는 주불대사관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백건우 부부는 지금까지 박씨를 북측 납치공작의 공모자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박씨는 “백건우 부부가 그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고 반박한 적 있다. 이 사건으로 백건우 부부는 이응노 화백 부부와 영영 절연했다. 이응노 화백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89년 숨졌다. 그 뒤 박씨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몇 달 전 그녀는 대전에’이응노 미술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박인경(82)씨와는 여전히 화해가 안 되는 건가요?

“하고 싶지도 않고, 그분은 지금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거짓말을. 본인이 그것을 아는지는 모르지만, 거짓된 생활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거죠.”

―김대중 정부 시절 이 문제로 국정원을 찾아갔죠? 그때 국정원장을 만났습니까?

“박씨의 실체를 국내에서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당시 천용택 국정원장을 만났어요. 하지만 별 조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어느 사석에서 천용택 원장으로부터 ‘그 직후 내가 물러나는 바람에 시간이 없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들었지요.”

―3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사건의 후유증은 이제 다 지워졌죠?

“그전에는 저희들은 문을 잠그지 않는 생활을 했어요.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을 생각 못 하고 살았죠. 얼마나 행복한 생활이에요. 하지만 그 사건 뒤로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게 돼요. 그게 너무 수치죠. 믿음이 없어졌으니까.”

―종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은 예술이겠지만, 한편으로 일상이지요. 그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합니까? 예술가들에게는 ‘광기(狂氣)’라는 게 있지요?

그는 이 질문의 뜻을 잠시 생각하더니, “내가 베토벤을 좋아하지만, 이 점에서는 같지 않아요. 연습이 끝나면 TV를 켜놓고 아무것도 신경 안 써요. 워낙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화 보는 걸로 긴장을 풀지요”라고 답했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선순위로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여러 가지로 궁금한 것이 많았어요.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미술사에도 끌렸고. 20대에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이제 모두 지나갔지만, 아직도 사진에 대해서만은 미련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처음 미국에서 외로울 때, 카메라 뒤에 서서 세상을 관찰하는 게 위안이 됐어요. 그쪽 사회에 직접 말을 걸지는 못하고, 렌즈를 통해 보고, 또 그것을 저 나름대로 프레임(틀) 안에서 컴포지션(구성)을 해보는 게 좋았어요. 만약 제가 피아노를 못 치게 되면, 여행하면서 사진작가로서 작업하고 싶어요.”

―피아노 치는 것 말고 취미가 있습니까?

“꽃꽂이를 하거나, 가구를 조립하는 것도 굉장히 즐겨요. 우리 집 가구는 거의 다 내 손으로 만들었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즐기니, 장보고 요리하는 것도 취미입니다.”

―작년에 신성일씨가 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가 ‘베토벤’에 관한 책을 넣어줬지요?

“베토벤은 너무나도 비참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걸 이기고 정말 승리의 길로 나갔잖아요. 그래서 힘이 되시라고 그 책을 선물했죠.”

―신성일씨는 책 내용보다는 베토벤의 헤어스타일에 반해 베토벤처럼 머리를 파마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선생은 본인이 직접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이발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진짜예요. 유학 시절 이발소에 가면 내 머리를 잘라놓은 게 마음에 안 들뿐더러, 그 당시에는 요금도 비쌌죠. 학생 형편으로 무시할 수가 없었죠. 시간 뺏기고 돈까지 줘가면서 마음에 안 들게 할 바에는, 그냥 내가 잘라야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내가 자르기 시작했죠.”

―안 보이는 머리 뒤쪽은 어떻게 자릅니까?

“(팔로 시늉을 해 보이며) 거울을 뒤로 이렇게 비추면 되지요.”

곁에서 윤정희씨가 “이이가 제 머리도 잘라요. 미장원을 간 적이 별로 없어요. 남들은 화려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 둘은 외모에 정말 신경을 안 써요”라고 덧붙였다.

―연주를 할 때 실수를 해도 청중들은 대부분 모르지요?

“실수를 많이 했어요. 실수 없는 연주회는 없어요. 그냥 넘어가니까 그렇죠. 청중들은 그걸 알 필요도 없고. 음악도가 자신의 선생님께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 음악회에 갔는데 어디서 무슨 음이 틀렸고 어디서 무슨 음이 틀렸다’고 얘기해요. 그러자 선생님이 ‘너는 그 음악회를 들은 것이 아니라 틀린 두 음만 들었구나’고 했어요. 전체적인 음악을 들을 줄 알아야지. 조금 안다는 사람들이 실수 지적을 하죠.”

―실수를 해도 객석(客席)은 모르는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연습을 하는 이유가 뭐죠?

“그건 악보에 성실하기 위해서지요. 객석은 몰라도 연주자 본인은 알지요.”

―음악인생이 50년이 되면,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그거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모를 것 같은데. 다른 음악인들은 저를 부러워하는데,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도 저는 시작에 불과한 것 같고… 그게 사실이에요.” 자정이 넘은 어둠 속에서, 한참 기다려 빈 택시를 잡았고 운전사는 이들 부부를 몰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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